새 국장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능률국 직원 전체의 건강의 날 행사를 갖게 되었다. 모처럼의 야유회이므로 직원들의 단합을 위해 전원 참여하라는 지시였다. 날짜는 업무에 지장이 없는 토요일, 장소는 북한산 백운대 아래 계곡으로 정했다. 순간 나는 내가 얼마 전에 내가 건의했던 ‘국장 통솔방침에 대한 소견’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은근히 흐뭇하기도 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날 하루는 가장 재미있고 유쾌하게 하라는 국장의 지시였다. 지시를 받은 4 과장들의 고민이 컸던 것 같다. 퇴근 시간이 훨씬 넘도록 머리를 짜낸 결과는 그날 사회자가 누가 맡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결론을 지었단다. 그래서 행정전산과 ㄱ계장, 바로 내가 낙찰되었단다. 늦은 저녁 먼저 퇴근하고 쉬는 시간에 나의 상사인 ㄱ과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잘 해주라는 부탁까지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즉시 펄쩍 뛰었다. 나이도 가장 많은 내가 주책없이 무슨 야유회 사회자냐며 한사코 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 결정된 일이니 어쩔 수 없다며 ‘지난 해 행사 때 잘 했지 않았느냐’ 하면서 무질러버린다. 그리고 내일 시나리오를 만들어 오라는 얼토당토 안 닿는 얘기를 늘어놓는다. 사실이지 지난해에 있었던 건강의 날 야유회 행사는 어쩌다 보니 내가 주도하여 즐겁게 보낸 적이 있었다. 아마 간부들은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최종 내가 맡아야 한다는 결론을 지은 것 같다.
과장들 중에서도 나의 상사인 ㄱ과장은 유달리 신경을 쓴다. 사실 어릴 적부터 학교생활은 물론, 공직 또는 사회생활에서 많은 경우 행사 진행을 맡았다. 공공기관의 의전행사 뿐 만 아니라 각종 결혼식이나 회갑연, 또는 콩쿠르, 야유회와 단합대회 등에서 선발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가능하면 나서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양은 했지만 무슨 힘으로 끝까지 버틸 수가 있겠는가. 마음의 정리를 해놓고 나름대로 시나리오까지는 안 쓰더라도 머릿속에 구상을 해 놓았다. 물론 과장들이 주문을 하는 ‘절대 국장 앞지른 언행이나 태도는 보여서는 안 된다’는 등의 경구도 염두에 두었다.
야유회의 날, 우리 직원들은 아침 일찍 모여 목적지를 향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독일병정’인 ㄱ국장이 맨 앞을 서고 그 뒤를 과장 이하 직원들이 따른다. 이때만 하더라도 나의 산행실력은 암벽을 하고 있는 시기였고, 적어도 워킹만큼은 소위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나보다 더 빨리 가는 산악인은 없다는 뜻에서 산우들이 ‘원효봉의 도사’라는 이름까지 붙여주는 산악실력가(?)였다.
이 정도의 산악인인 내가 앞서가는 젊은 간부들 쯤이야 팔 안에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 어쩌다가 내가 ‘독일병정’을 잊고 한 발 자국이나 앞서 가면 간부들은 나를 붙잡고 막곤 했다. 미움을 타면 안 된다는 어린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서 애써 따라주었다.
목적지인 아름다운 북한산의 가을은 우리를 대자연의 품안으로 안겨준다. 백운대와 만경대, 그리고 인수봉이 모여 있는 곳, 점심시간에는 호연지기의 기분으로 질 좋은 음식과 술로 분위기는 고조에 달한다. 본격적인 오락회가 벌어질 참이었다. 이제부터는 나의 시간이다. 단합대회를 추진하는 대회장으로 나서서 사회를 진행하는 것이다.
먼저 국세징수법에 따라 성별, 연령, 계급, 권위, 체면 등 5대 몰수조치를 취했다. 회원들의 동의까지 받아 두었다. 그리고 각 과에서 차출된 선수들의 노래자랑이나 장기자랑을 펼쳐갔다. 이때 나는 처음 단언한 대로 직원은 물론, 간부나 여직원, 연장자까지도 절대로 관직명은 쓰지 않았다. 오직 00 씨나 회원 또는 위원 등의 명칭으로 불렀다. 예를 들면 최고의 상사인 ㄱ국장까지도 ㄱ00 위원이라고 불렀다.
분위기가 한참 무르 익어갈 무렵 나는 특별 초청 가수로 ㄱ00 위원(국장)을 불러내어 노래를 시켰다. 그는 순순히 대회장인 나의 명령(?)에 따랐다 그리고 트롯 18 번 노래를 불러대는 것이다. 잘 불렀든 잘못 불렀든 박수는 크게 받았다. 그는 참말로 잘 부른 줄로 알고 더욱 기뻐하며 그 귀한 ‘시바스’ 양주를 직원들에게 따르며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다. 나는 그때마다 이런 기분파이며 좋은 분을 ‘왜 무섭다니, 고집이 세다느니, 또는 앞뒤 없는 독일병정이니 하는가’ 하고 자문해 보기도 했다. 정말 멋있는 상사임에 틀림없었다.
이미 편성된 심사위원들의 심사결과가 발표되고 잔치의 마무리 단계가 왔다. 나는 그때 처음에 몰수했던 5 가지를 말 한 마디로 모두 되돌려 주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는 한 회원의 자격으로 참여했던 ㄱ국장도 평소의 우리 상사가 되는 것이다. 이때 나는 ㄱ국장을 연단의 중앙에 모시고 일제히 거수경례로 존경의 표시를 하게 한 다음, 시상과 훈시를 하도록 했다. 그는 강평에서 ‘태어나 하루 종일 웃어보기는 오늘이 처음’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매우 기분 좋은 표정에서 직원들의 열렬한 박수와 함께 인기 절정에 이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행사가 끝난 다음에도 과장 이상의 간부들을 따로 모이게 하고 사우나와 후렴 소주 파티로 오후 늦게까지 즐겼다고 했다. 5급 이하 직원들도 별도로 막걸리 파티를 열었다. 이튿날 아침 국장실 간부회의 자리에서 나를 불러 차를 권하며 격려해주는 것이다. 동석한 ㄱ과장은 제일 흐뭇한 듯이 보였다.(계속)
